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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타인의 고통 - 수잔 손택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연했던 '텔미썸딩'은 저에게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영화였어요. '출발 비디오 여행'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를 보고 무척 끌렸지만, 당시 열 일곱이던 제가 볼 수 없는 '청소년 관람 불가'의 등급이었죠. 하지만 비디오 출시 후 동네 비디오가게 누나를(아, 그누나 이뻤는데..) 잘 꼬셔서 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때는 뭔가 잔인한 장면에 묘한 쾌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제 취향에도 변화가 오긴 오더군요. 

이연걸이 주연했던 영화라 기억하는데, 그가 쏜 총알에 악당들이 달려와서 맞아 죽는 장면이 있었어요.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겠다 싶어 우스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평생 나쁜 짓만 일삼고 살아온 그 사람도 못난 연정이나마 던져보려 했던 사람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자리에 오기 전, 사랑하는 누군가와 헤어지며 '좀 있다가 봐'라는 가벼운 약속이라도 했다면, 그게 슬펐어요. 어디까지나 영화 속 배역에 지나지 않지만, 분리수거를 거친 일반쓰레기처럼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고쳐 생각해봐도 찝찝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어떤 영화가 됐건 사람을 가볍게 죽여버리는 영화는 피하게 됐어요.

생각해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충격파에 무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연평도 사건이 발발했던 당시, 파주에 자리한 회사에서 근무하던 저는 구글 지도로 연평도와 파주의 직선 거리나 재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의 예정에 있던 예비군 훈련이 더 힘들어 질 걱정이나 했어요. 누군가는 그 시각에 피폭으로 인한 충격과 (그래봤자 간발의 차이였을 곳인데)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을 텐데요. 골똘히 생각해 보자니, 이라크 전쟁은 거들떠도 안 봤어요. 9.11 사건 때는 충격적인 블록버스터 영화 보듯 뉴스를 감상했던 것 같아요.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그랬어요. 엄마 품에 안겨 부르르 떨면서 뉴스 보도를 보았고, 수 일이 지나서 구조된 사람들을 볼 때 저도 모르게 눈물흘렸던 것 같아요. 


'사진에 관하여', 최근에 주목 받았던 '해석에 반대한다'처럼 특유의 명쾌한 논리와 직설적인 어법으로 유명한 수잔 손택의 '가장 최신작'인 '타인의 고통'을 읽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에 관하여'의 연장선에 놓인 논의일 거라 짐작해요. 주로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로 알린 사진들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이 모두 그녀의 타겟입니다. 사진을 '찍다'와 총을 '쏘다'에 모두 'Shot'이라는 동사를 현상에 대해 두 가지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유사성을 설명합니다. 특히 현재까지 잘 알려진 유명한 전쟁 사진들은 대부분 연출된 사진이라는 고발은 큰 충격이었어요. 연출되지 않은 이미지 역시 특정 목적을 위해 남겨진 거란 이야기죠. TV의 등장 후에도 인간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된' 것은 마찬가지였죠. 그 사이에 인간은 충격에 대해 무뎌지게 됩니다. 남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그런 장면들을 모아 보고, 찾아보는 이상한 취향도 생겼다는 거에요.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같은 것들이 예가 되겠죠.


발전 일로에서 앞으로 전진하면 할 수록 인간은 남의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해져요. 남의 고통을 우리는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대게는 잊혀지고 버려지는 '처리'과정으로 넘겨버리죠. 수잔 손택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꼬집고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피가 피를 부르는 전쟁 대신, 진정한 의미의 해결에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 역시 한동안 전쟁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권터 그라스의 대표작인 '양철북'을 읽다가 다음 줄을 읽기 두렵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폴란드 우체국에서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느꼈었는데 요컨데, 제 눈 앞에서 파편이 튀고 총알이 제 몸을 관통하고 나가버리는 상상을 하게 됐었거든요. 끔찍했습니다. 여러모로 전쟁은 절대 안 될 일이에요.


어쨌건 수잔 손택의 논리와 어조는 맘에 들어요. 책을 읽으면서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참 많은 생각을 했고, 책을 덮을 때는 짧게나마 탄성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런 글을 읽고서는 어떤 글을 써도 참 모자라 보이네요. 이 글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고, 아무튼... 또 며칠간 괴로워 해야겠어요.


그럼 안녕! 

(보시는 분들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이번 서평만큼은 'mind'로 합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